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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받는 글로벌IT기업 - 중] 낮은 자세로 명예 회복 노린다


 

90년대 중반 모토로라의 아성을 꺾고 세계 최강의 휴대폰 제조사로 등극한 노키아는 최근 일본에서 일본, 한국 등의 담당임원들을 모아 놓고 긴급회의를 열었다. CDMA와 WCDMA를 대표하는 두 국가에서의 시장진입 실패 이유를 분석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한 새로운 현지화 전략을 집중적으로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GSM 분야에서는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노키아였지만, CDMA와 WCDMA 등에서는 여전히 약체였다. 회의에서 내린 결론은 하나. 기존의 '무늬만 현지화'로는 더 이상 두 시장을 뚫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맥못추는 세계최고'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노키아, 모토로라, 노텔, 델, 애플 등의 한국내 사업 기류가 최근 급변하고 있다. 이동통신 및 인터넷 분야에서 세계적 '테스트베드'로 큰 상징성을 갖고 있는 한국에서는 유독 '토종 파워'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들. 이름값을 못해 자존심을 구긴 이들이 이제는 자세를 좀 더 낮추고 국내 사정에 맞는 '현지화 전략'으로 권토중래할 것을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이다.

◆ 비싼 수업료의 결론 '현지화'

노키아는 지난 2000년 초 국내 중견 휴대폰 제조사인 텔슨전자와 개발자주도형생산(ODM) 계약을 맺고 한국 시장 진출을 모색했다. 하지만 결과는 뼈아팠다. 완벽한 실패를 맛본 것.

텔슨전자 관계자는 "동업이 실패한 이유는 한국 시장의 급변하는 트렌드 변화를 제 때 반영하지 못하는 노키아의 느린 의사결정 구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노키아측은 "파트너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한국사업의 첫 단추를 잘못 꿴 결과로 소득없이 얼굴만 구겼다는 것은 분명하다.

준비 안된 현지화로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노키아는 다시 새로운 한국 사업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일본 회의의 결론도 그같은 방침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노키아는 더 이상 중앙집중적인 의사결정 구조로는 한국 시장을 뚫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권한을 한국, 일본 현지 책임자들에게 대폭 넘겨주기로 했다. 세계 휴대폰 1위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CDMA, WCDMA 시장 등을 방치할 수 없기 때문에, 본사의 방침을 바꾼 것이다.

특히 세계 CDMA 시장의 패권을 쥐고 있는 삼성전자, LG전자, 팬택계열 등과의 경쟁에서 이름값을 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는 '안방' 싸움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노키아는 한국 시장 재진출 계획 추진과 함께 북미 등에 출시할 EV/DO폰 소싱을 위해 국내 SK텔레텍 등과 ODM 협상을 벌이고 있다.

지난 해 세계 MP3 기기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애플도 한국 시장에선 '마이너'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일부 마니아층이 존재하고 있으나 시장 점유율만 놓고 보면 아이리버, 삼성전자, 거원시스템, 엠피오 등 토종 업체들에 밀려 명암을 내밀기도 창피할 정도다.

전문가들은 "애플이 본사의 글로벌 스탠다드 정책을 한국에서도 그대로 고집하다 보니까 형편없는 실적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애플의 한국 지사는 신제품이 국내에 출시되기 직전까지도 신제품에 관한 정보를 얻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애플도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해 9월 손형만 사장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애플코리아 지사장에 오른 것이 우선 큰 변화다. 그동안 변변한 마케팅 활동 한번 하지 못했던 애플은 최근 드라마 간접광고(PPL) 등을 국내에서 대폭 늘리고 있다.

실제로 김희선, 권상우 주연의 MBC 수목드라마 '슬픈 연가'에 PPL 광고를 했다. 가수 비, GOD의 콘서트에도 협찬사로 참여했으며, 여러 뮤직비디오를 통해서도 '아이팟' 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또 지난해 유명 브랜드 '펜디'와 공동 마케팅을 전개하면서 펜디가 아이팟 미니 전용 가방을 출시했다.

그 뿐 아니다. 국내 커뮤니티 사이트 싸이월드(cyworld)에 아이팟 전용 홈페이지도 오픈한다. 애플이 가진 각종 콘텐츠와 이벤트를 싸이월드 이용자에게 알리면서 소비자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겠다는 시도다.

하지만, 애플의 이 같은 현지화 실험은 아직 미완이다. 최근의 오락가락한 가격 정책으로 소비자만 골탕 먹은 사례가 이같은 시행착오의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손형만 사장은 국내에서만 가격을 인하한다고 발표하면서 "본사가 가격을 정하지만 원가절감, 환율가격인하 요인이 생기면 지사에서도 이를 반영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 파격적인 가격인하를 단행했다. 하지만 불과 며칠만에 백지화했다.

그 뿐 아니다. 애플코리아는 원상복귀 시킨 후 불과 열흘도 안돼 가격을 다시 내리는 '해프닝'을 벌였다. 애플 본사가 제품을 출시와 함께 글로벌 판매가격을 내린 데 따른 것. 의욕적인 현지화 전략이 본사의 높은 벽에 부딕쳐 큰 낭패를 겪은 것이다.

◆ 무늬만 현지화로는 안된다

모토로라 역시 한국에서 비싼 수업료를 물었다.

전세를 바뀌기 위해 지난 99년 막대한 돈을 들여 국내 대표 중견업체였던 어필텔레콤의 경영권을 인수하는 한편 팬택과의 지분 제휴도 맺었지만, 6년이 흐른 지금도 국내외 CDMA 시장에서 모토로라의 위치는 여전히 마이너다.

전직 어필텔레콤 출신의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모토로라의 의사결정 구조가 너무나 느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팬택앤큐리텔 등이 뛰어 갈 때, 모토로라는 기고 있었다는 푸념이다.

이 처럼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모토로라는 지난해부터 한국 사업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나섰다. 지난 해 어필텔레콤을 합병한 뒤 올 초에는 양재동에 신사옥을 마련, 아예 살림을 합쳤다. 한국 사업을 일원화해 의사결정 구조를 단순화하겠다는 뜻이다.

또 '모토로라 부활'의 신호탄으로 여겨질만큼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레이저 V3 GSM폰의 CDMA 버전 출시를 북미보다 한국에서 먼저 하겠다는 방침도 정했다.

통신장비 시장의 강자인 노텔네트웍스는 삼성전자, LG전자 등에 밀려 국내 WCDMA 장비 수주전에서 2년전 고배를 마셨다. 삼성전자는 SKT, LG전자는 KTF의 WCDMA 장비 우선 납품 업체로 선정되어 있는 상황이다.

노텔로서는 국내 이동전화 장비 시장을 포기하든가, 아니면 3.5세대나 4세대 장비 시장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였다. 이 때 노텔이 던진 카드는 'LG와의 합작사 설립'이었다. LG전자 역시 해외 시스템 장비 시장에서는 브랜드 파워, 자금력, 정치력 등의 열세로 마땅한 수요처 한번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처지였다. 양사가 서로 주고 받을 게 큰 합작인 셈이다.

노텔은 국내 업체와 피를 섞는 현지화를 통해 국내 WCDMA 장비 시장 에서 활로를 마련했다.

'직판 모델'의 글로벌화를 추구하는 델 역시, 한국에서도 똑같은 사업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2,3년전만해도 델의 직판 사업 모델은 한국에서만큼은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델의 직판모델이 힘을 쓰기 시작한 것은 현지화 전략과 병행하면서 부터.

델은 2년전 호주 출신의 외국인 지사장을 대신해 컨설턴트 출신의 한국계 김진군 씨를 이례적으로 지사장에 앉혔다.

또 옛 컴팩코리아, 한국HP, 옛 LGIBM 등의 IA서버 실무진, NEC 지사장 출신의 정철상무, AMD 지사장 출신의 박치만 상무 등 국내 컴퓨터 시장에서는 잔뼈가 굵은 영업통들을 대거 영입했다. 당시만해도 델 한국지사의 인력은 20여명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그 10배인 200여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또 서비스도 대폭 강화해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을 중심으로 구입 초기 3개월 간 '즉시출장' 서비스를 한국에서만 실시하고 있다.

한국델은 '선택과 집중'의 차원에서 국내에서는 당분간 중소기업시장 공략에 전력 투구할 계획이다. 잘 하는 분야를우선 집중 공략한다는 현지화 전략인 것. 프린터나 가전분야의 제품도 컴퓨터를 구매하는 중소기업용으로 특화된 제품을 우선 선보일 예정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델의 한국 위상은 종전에 비해 상당히 강화됐다. 지난 해 4분기 PC 부문 6위, 워크스테이션 2위, IA서버(인텔기반서버) 3위로 부상했다.

◆ 현지화 전략과 글로벌 전략의 조화가 '열쇠'

한편 지난 70~80년대만 해도 가장 현지화가 잘된 다국적 기업으로 꼽혔던 한국IBM은 90년대말부터는 오히려 '글로벌화'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현지화의 축을 중시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2003년 일산, 분당, 서초동 등에 '어린이집'을 세웠다. 대교, NHN, 하나은행 등과 함께 세운 어린이집은 임직원이 자녀를 믿고 맡길 수 있어 인재 유치에 적잖은 효과를 내고 있다.

또 지난 해 6월말에는 강남구 도곡동 본사에 400여명 규모의 'IBM 유비쿼터스 컴퓨팅 연구소'를 세웠다. 앞으로 4년동안 정보통신연구진흥원과의 공조를 통해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핵심 분야인 텔레매틱스,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등의 분야 기술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한국HP도 비슷하다.

이 회사는 합병한 컴팩코리아의 노조를 승계, 전임자 2명과 사무실을 따로 둘 정도로 다국적 기업 중 매우 활동적인 노조를 두고 있다.

무선통신 분야에서 앞선 국내 산학연과의 협력으로 새로운 피를 수혈받겠다는 뜻이다.

또 올해 1월 1일자로 한국HP 이기봉 부사장이 아태 동남아 지역 총괄 부사장으로 임명됐다. 이 부사장은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베트남과 함께 파키스탄, 캄보디아 등 수십개의 아시아 개발도상국을 총괄하게 된다.

IP 네트워크 장비 시장의 최강자인 시스코코리아의 경우에는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되는 경우다.

이 회사는 국내 통신시장이 정체기를 맞자, 중소기업 시장 등의 공세 수위를 높이기 위해 지난 1년간 이례적으로 국내 지사에 납품가를 어느정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재량권을 줬다.

'글로벌 스탠다드'를 늘 강조해온 시스코코리아로서는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중저가 네트워크 장비 시장에서는 시스코코리아의 시장 점유율이 몰라보게 높아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수익성 등의 측면도 고려할 때 시스코 본사가 지난 1년여간의 한국 사업을 한, 두달 내에 평가하면서 글로벌 스탠다드와 현지화 중 앞으로 어느 축에 힘을 싣게 될지 주목된다.

이관범기자 bumie@inews24.com 강호성기자 chaosing@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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