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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계 밥그릇 싸움 '의약품 재분류', 결국 정부가 '손질'


식약청 주도 재분류 추진에 의·약계 반발…국민 건강은 여전히 뒷전

[정기수기자] '의약품 재분류'를 둘러싼 양보 없는 의·약계간 업권 다툼으로 인해 결국 정부가 직접 기준을 제시하고 재분류를 추진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처럼 식약청이 의약품 재분류안을 자체적으로 마련키로 한 데 대해 의료계와 약사계는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강력히 반발하고 있어 향후 논란이 예상된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올 연말까지 과학적 원칙에 입각해 4만여개 전체 의약품에 대해 의사 처방이 없어도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일반약이나 처방이 필요한 전문약으로 나누는 재분류를 실시한다고 지난 8일 밝혔다.

이에 따라 지난 1999년 의약분업 이후 12년 만에 국내 의약품 3만9천254개 모두를 일반약과 전문약으로 구분하는 의약품 재분류가 이뤄지게 됐다.

이날 약심 회의를 거쳐 확정된 분류안은 이르면 1주일 안에 고시를 거쳐 시행된다.

식약청은 오는 11월 말까지 분류를 완료, 검토결과에 대해 12월 중순 관련 단체 의견수렴 및 중앙약심회의를 거쳐 오는 12월말 의약품 재분류를 확정할 계획이다.

재분류 기본원칙은 복지부 고시인 '의약품 분류기준에 관한 규정'과 부작용 발생현황, 약리기전 비교 등 과학적 근거자료를 토대로 체계적으로 실시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향후 최신의 과학수준을 신속히 반영해 의약품 재분류를 상시화하기 위해 '상시 재분류 체계'도 구축한다.

현재는 전문약-일반약 2분류 체계에 따른 분류작업을 하고, 약사법이 개정될 경우 '약국외 판매 의약품'을 추가해 3분류 체계로 전환해 분류 작업을 진행한다.

◆식약청 "업권 다툼 영향 없애고 '과학적 근거' 추진"

전문약에서 일반약으로 전환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료계와, 의약외품 전환을 전문약의 일반약 전환으로 보상받으려는 약사회간의 대립이 극에 달했다. 따라서 과연 적합한 근거를 바탕으로 재분류가 이뤄질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돼 왔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번 식약청의 의약품 재분류 추진은 의·약계간의 '밥그릇 싸움'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과학적 판단에 근거해 주도적으로 재분류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식약청 유무영 대변인은 "전체 품목의 재분류를 올 연말까지 마쳐야 하는데 현행 약심 체계로는 평행선에서 논의가 소모적으로 진행될 우려가 많았다"며 "의약품 재분류는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때문에 접점을 가지고 좁아질 사안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재분류 실시에 있어 결국은 보편성과 객관성을 담보하느냐가 관건"이라며 "무작정 약심의 합의를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정부의 의약품 재분류 추진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식약청은 향후 중앙약심 의약품분류 소분과위원회를 의협, 약사회 등 이익단체와 관련이 없는 중립적인 외부전문가로 재구성할 계획이다.

아울러 이날 열리는 약심 5차 회의를 끝으로 기존의 의·약계 단체 소속 위원이 12명 중 3분의 2를 차지하는 약심은 더 이상 열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30여명의 직원으로 구성된 '분류 추진TF(태스크포스)'를 통해 1차 재분류안을 만들고 현재 의사단체와 약사단체 위주로 구성된 약심을 중립적인 인사들로 개편, 자문을 거쳐 재분류안을 연말까지 확정할 방침이다.

◆의·약계 "끼워 맞추기 재분류" 강력 반발…인공눈물 등 3개 품목 절충안에는 합의

다만 이날 5차 약심에서 인공눈물 등 3개 전문약을 질환에 따라 일반약과 전문약으로 모두 인정한다는 최종 결정이 내려진 데 대해서는 의·약계는 다소 안도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이날 약심에서는 논의를 통해 라니티딘은 일반약으로 전환키로 했으나, 히알루론산나트륨과 파모티딘, 락툴로오즈시럽 등 3개 성분은 효능·효과에 따라 전문약과 일반약 영역에 모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예를 들어 히알루론산나트륨의 경우 인공눈물로 쓸 경우 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반면, 결막염 치료제로 쓸 경우에는 의사의 처방을 받도록 한다는 것이다.

파모티딘 역시 속쓰림을 완화할 목적으로 구입할 경우 약국에서 구입 가능한 일반약으로 취급하는 반면, 위궤양이나 역류성 식도염의 치료 목적으로 쓰려는 경우에는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전문약으로 취급하는 방안이 도출됐다.

하지만 식약청이 제시한 의약품 재분류 로드맵에 대해서는 약사회는 환영의 의사를 밝힌 반면, 의료계는 반대 입장을 표명해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갈렸다.

실제로 식약청이 8일 개최한 중앙약사심의위원회 5차회의에서는 시민단체가 재분류를 요청한 17개 품목에 대한 식약청의 검토 결과를 놓고 위원들간의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재호 대한의사협회 이사는 4개 전문약의 일반약 전환에 대해 "식약청의 재분류 원칙은 적용사례를 보면 미리 결과를 정해 놓고 끼워 맞췄다는 느낌이 든다"며 "복지부가 기존에 정한 4개 일반약 전환 품목이 그대로 적용됐다"고 지적했다.

이재호 이사는 식약청이 제시한 의약품 재분류 로드맵에 대해서도 불만을 나타냈다. 그는 "전 세계 각국의 사례를 볼 때 의료계 의사가 참여하지 않고 재분류 하는 경우는 없다"며 협회 측 입장이 배제된 재분류에 의문을 표했다.

그는 또 중앙약사심의위원회 의약품분류소분과위원회를 중립성을 갖춘 인사로 개편하겠다는 방침에 대해서도 "학계에 중립적인 인사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대한약사회는 전문약과 일반약의 재분류를 상시화하기로 한 식약청의 재분류 로드맵 방침에 대해서는 환영의 의사를 나타냈다.

박인춘 대한약사회 부회장은 "정부가 상식적인 분류체계를 확립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며 "의약분업 후 12년째 한 톨의 전문약도 일반약으로 전환된 적이 없다"며 "정부가 상시적인 의약품 분류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식약청의 의약품 재분류 결과에 대해서는 불편한 속내를 나타냈다. 약사회는 항생제 성분이 들어 있는 여드름 연고인 클린다마이신 외용액과 테트라사이클린 연고 등 일반약 2개 품목의 전문약 전환에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박 부회장은 전문약 전환 품목에 대해서 "일반의약품에서 전문의약품으로 전환될 때는 부작용 등이 발생할 경우 뿐"이라며 "부작용 피해를 봤다는 구체적 사례가 보고되지 않았는데도 꿰맞추기 식으로 전문약으로 전환한 2개 품목은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소모적 논쟁, 정부에 재분류안 넘겨줘…약심 정체성 '흔들'

이처럼 마지막 약심까지도 직역간의 이해로 각각의 사안에 대해 이견이 갈림에 따라 국민 건강은 뒷전으로 한 채 의·약계간 소모적 논쟁으로 결국 재분류안을 정부의 손에 넘겨 주게 됐다는 게 업계의 비판이다.

반면 일각에서는 그동안 진행됐던 의약품 재분류 논쟁이 이해 당사자들의 대립이 큰 만큼 이번 식약청 주도로 마련한 의약품 재분류 추진에 대해서는 대체로 적절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동안 의·약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의 역할이 미비하다는 의견이 제기돼 왔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의약품 재분류 논의를 위한 중앙약심이 이해단체들의 밥그릇 챙기기 싸움터로 전락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의약품 재분류는 업권 획득을 위한 전략이 아니라 '국민건강'이라는 원칙 아래 논의가 이뤄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이번 정부 차원의 의약품 재분류를 위한 구체적인 원칙과 기준 제시는 적절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덧붙였다.

또 그동안 의사회측 반, 약사회측 반으로 이뤄진 위원회를 중립적 인사로 재구성한다는 방안에 대해서도 대체로 긍정적인 전망이다.

그동안 약심 위원회 구성 자체가 바람직한 결론을 쉽게 낼 수 없는 대립적 구조였던 사실을 고려해 보면 이번 조치가 합리적이라는 것.

아울러 약물에 대해 전문성이 보장된 임상약리학 교수나 환자 측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위원 등도 함께 고려돼야 한다는 게 관련업계의 목소리다. 다만 학계에서 양 측에 이해관계에 얽혀 있지 않은 인사를 찾는다는 게 그다지 쉽진 않을 것이라는 우려다.

한편, 식약청 주도로 전체 의약품의 재분류안이 추진됨에 따라 그동안 의약품 재분류를 위한 논의를 전개해 왔던 중앙약심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또 이번 조치로 인해 가뜩이나 대립각이 세워진 의·약계간에 또 다른 앙금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결국 식약청에서 결정한 재분류안으로 진행된다면 그동안의 약심의 정체성은 무의미하다"며 "약심에서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한 채 결론내려진 이번 재분류로 의·약계간 풀 수 없는 새로운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정기수기자 guyer73@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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