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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신문 5년, '아이뉴스24' 5년


 

인터넷신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전인 1992년이다. 미국의 시카고 트리뷴이 당시로선 생소하기 그지없던 '인터넷신문'을 선보이면서 인터넷 저널리즘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한국에서는 1995년 중앙일보를 필두로 조선, 동아 등이 경쟁적으로 인터넷 서비스 경쟁에 동참했다. 그 뒤 딴지일보같은 대안매체가 등장하면서 '인터넷으로 신문을 보는' 문화가 서서히 정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진정한 인터넷 저널리즘 혁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 쪽은 종이신문의 기사를 인터넷에 퍼다붓는 셔블웨어(shovelware)식 편집에 머물렀으며, 또 한쪽은 인터넷 저널리즘의 여러 영역 중 '대안성, 풍자성' 쪽에 경도돼 있었기 때문이다.

'미완의 대기'였던 인터넷 저널리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은 2000년 초였다. 세상이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희망으로 넋을 놓고 있을 무렵, 우후죽순처럼 인터넷신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밑바탕엔 그 전해부터 테헤란밸리를 거세게 강타했던 '닷컴 혁명'의 도도한 물결이 자리잡고 있었다.

◆ 기자들, 독자들과 직접 만나다

1999년말부터 불기 시작한 벤처 열풍은 언론계까지 뒤흔들어 놓았다. 언론계에 사상 유례없는 '엑소더스'를 몰고 왔던 것이다.

당시 '기자협회보'나 '미디어오늘' 같은 매체에는 기자들의 연쇄 퇴직을 우려하는 기사들이 심심찮게 등장했다. 종합일간지나 경제지의 경제부, 정보과학부 기자들 사이엔 '닷컴으로부터 스카웃 제의 못 받은 기자는 무능한 기자'란 농담이 유행하기도 했다.

언론계를 떠난 기자들 중엔 벤처사업가로 성공적으로 변신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상당수 기자들은 변화된 환경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벤처 역풍을 맞고 씁쓸하게 돌아서야 했다.

이처럼 벤처 열풍은 '한 여름밤의 꿈'처럼 허무하게 끝났다. 그러나 벤처의 꿈이 사그라들고 있을 무렵, 한 켠에선 조용한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바로 언론계의 기본 패러다임을 뒤흔들 '인터넷 저널리즘 혁명'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아이뉴스24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뉴스24는 2000년 2월 14일 처음 시험 서비스를 시작했다. 불과 10여 명의 기자들이 밑바탕이 됐던 아이뉴스24는, 시험 서비스와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3월20일. 마침내 인터넷신문 아이뉴스24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창간 당시 아이뉴스24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격려와 축하 메시지들이 쇄도했다. 언론학자들이 '상호작용성'이라고 부르는, 독자와의 직접 교류를 몸소 체험한 기자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온 몸에 진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사를 출고한 지 불과 5분만에 독자들로부터 이메일이 날아오기도 했다. 때론 기자가 놓친 부분에 대한 추가 취재를 요구하기도 했고, 또 때론 기자의 짧은 식견을 꾸짖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속시원한 기사'라는 격려의 메시지도 끊이지 않았다.

종이신문 기자 생활과는 사뭇 다른 역동적인 반응을 접한 기자들은 '짜릿한 오르가즘'을 느꼈다. (아직도 우리는 당시의 경험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고 닷컴 기자로의 변신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메인 스트림(main stream)'을 자처했던 오프라인 언론들은, 막 커나가기 시작한 온라인 언론들을 쉴 새 없이 견제했다. 폐쇄적이기로 유명한 기자실의 문턱도 높기만 했다.

몇 개월전만 해도 '상식'이었던 것들도, 닷컴기자란 명함을 내미는 순간 '엄청난 벽'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언론'에 대한 꿈과 희망이 있었기에, '엄청난 벽'도 우리에겐 넘어야 할 목표물에 불과했다.

그리고 5년. 이제 인터넷 언론사는 법적으로도 언론의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우리 기쁨의 근원은 '법적인 지위'를 보장받는다는 '텍스트(text)' 때문이 아니다. 언론의 패러다임이 온라인으로 옮겨오고 있다는 '컨텍스트(context)'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인터넷 매체, 언론의 패러다임에 물음표를 던지다

아이뉴스24가 출범하던 2000년 3월20일은 마침 골드뱅크의 주총이 예정돼 있었다. ‘광고를 보면 돈을 준다’는 컨셉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골드뱅크가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면서 이날 주총에 전 미디어들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당시 아이뉴스24는 민완기자 두 명을 급파해 ‘현장중계’ 형식으로 처리했다. ‘골드뱅크 경영권다툼 기자회견 현장’이란 제목의 그 기사는 당시로선 하나의 파격이었다.

"20일 9시 30분. 서울 여의도 증권업협회 8층 기자실과 홍보실. 아침부터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몇몇 기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대화를 나누고 있다. "24일 주총에서 김진호가 밀려난다며?" "그게 어디 쉽겠어" "아냐! 아무래도 이번엔 심상치가 않아!" "금고나 농구단 인수를 놓고 반대하는 세력이 많다던데?" "아무튼 오후에 이지오스 측에서 온다니까 얘기를 들어보면 알지""란 서두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당시 이 기사를 놓고 내부에서도 반응이 엇갈렸다. '이게 무슨 기사야?'란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기존 기사 문법의 ABC를 강조했다. 그들은 오랜 기간 정착된 관행을 무시한 기사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렇지만 대다수 기자들은 '정말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럴듯한 동영상 하나 붙어있지 않은 기사였지만, 당시 아이뉴스24의 골드뱅크 주총 기사는 인터넷 저널리즘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한 작품이었다.

흔히 새로운 매체가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선 그 매체의 강점을 살려줄 수 있는 사건이 벌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이뉴스24 창간 당일 열렸던 골드뱅크 주총은 인터넷신문 아이뉴스24의 탄생을 축하하는 멋진 사건이었다.

(여기서 잠시 언론학 교과서를 펼쳐 보자. 라디오를 살린 게 1차 대전이라면, TV는 케네디 암살, 달 착륙 보도 등을 통해 주류 미디어로 떠올랐다. 전쟁보도 역시 언론 매체 발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언론학계에선 베트남 전쟁을 TV로 보도된 첫 전쟁, 걸프 전쟁은 처음으로 위성보도가 동원된 전쟁으로 기억하고 있다. 반면 코소보 전쟁은 인터넷이 주류 미디어로 등장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 뒤 현장중계 기사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오마이뉴스는 그 해 10월 27일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병관 동아일보 사장의 고려대 앞 추태’를 17시간 동안 현장중계로 처리해 성가를 드높였다. 이후 조선, 동아 등 기존 언론들이 운영하는 인터넷신문들 역시 현장 중계 방식의 기사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인터넷신문은 기사의 기본 패러다임에 쉴 새 없이 의문부호를 던졌다. 사실 절대적인 기사 형식이란 것은 없다. '토대가 상부구조를 구축한다'는 맑스의 금언은, 기사 형식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그 매체의 강점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기사 형식이, 가장 훌륭한 기사 형식이라고 봐도 크게 그르지 않다.

◆ 인터넷 언론이 쏘아올린 특종들

4.15 총선을 불과 닷새 앞둔 2000년 4월10일. 박지원 문화부 장관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정상 회담을 갖는다고 공식 발표한 것.

박장관이 남북정상회담 사실을 공식 발표할 무렵, 아이뉴스24 사이트에는 '정부, 남북 정보통신 협력 추진'이란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정상회담 발표 하루 전에 '남북 정보통신 협력'이란 대특종 기사를 내보낸 것이다. 물론 당시 아이뉴스24 편집진은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후 이 기사는 박지원 장관의 남북 정상회담 공식 발표 이후 '남북 통신협력 급물살 탄다'로 제목이 바뀌면서 한 발 앞서나갔다. 그야말로 절묘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초기 아이뉴스24를 지탱해 준 대특종은 이 뿐이 아니었다. 데이콤의 한국인터넷데이터센터(IDC)에 들어와 있는 일부 서버가 해커들의 경유지로 사용되고 있다는 기사를 비롯해 남북간 인터넷전화가 가능하다는 소식들 역시 아이뉴스24가 초기에 일궈낸 특종들이다.

아이뉴스24 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인터넷 저널리즘 현장을 굳게 지키고 있는 대다수 인터넷신문들은 초기부터 '특종 행진곡'을 힘차게 불렀다.

오마이뉴스의 소위 386 의원들 광주 술판 사건 보도도 초창기 인터넷신문의 대표적인 특종 중 하나였다. 당시 이 기사는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들이 그동안의 관례를 깨고 오마이뉴스를 인용 보도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데일리 역시 사이트 출범한 지 불과 사흘 만에 ‘제일제당, 삼구쇼핑 인수’ 특종 기사를 터뜨렸다. 당시 이데일리에 이 기사가 나가면서 바로 증시에 반영돼 ‘인터넷 신문의 위력’을 새삼 과시했다는 후문이다.

이 무렵 '인터넷신문=특종 제조기'란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굵직한 특종들이 잇따라 쏟아져나왔다. 인터넷신문이 연착륙할 수 있었던 데는 각 사들이 출범 초기부터 굵직한 특종을 터뜨린 것이 크게 작용했다.

반신반의하던 독자나 투자자, 업계 관계자들은 오프라인 신문에 비해 결코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쉴 새 없이 기사를 생산해 내는 인터넷 신문 기자들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

특히 별도 마감 시간 없이 수시로 기사를 쏟아내는 인터넷신문은 ‘정보의 바다’라는 21세기의 컨셉과도 잘 맞아 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임영호 교수는 지난 1997년 '신문과방송'을 통해 ‘마감 개념 무의미, 심층취재 활성화: 사이버 저널리즘 시대가 열렸다’고 규정했다.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이 같은 진단은 인터넷신문이 본격 등장한 2000년 초중반부터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언론학계에선 ‘온라인 저널리즘과 새로운 패러다임’(연세대 윤영철 교수, 사이버커뮤니케이션학회 학술대회, 2000) 같은 제목들이 심심찮게 등장했다. 언론 환경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학계에서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 유료화, 수익모델, 그리고 독립언론의 힘

초기 닷컴혁명을 이끌었던 수많은 인터넷기업들은 '돈 버는 일'에는 상당히 서툴렀다. 당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새롬, 골드뱅크 같은 기업들도 돈을 벌지 못했다. 그저 참신한 아이디어로 많은 투자자들의 지갑을 열었을 뿐이었다.

당시엔 '콘텐츠와 커뮤니티만 확실하면 돈을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것이 상식이었다. 아이뉴스24 설립 당시 컨설팅을 해줬던 모 경제연구소의 연구원도 "굳이 돈 버는 문제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 좋은 콘텐츠만 만들면 된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이런 상식이 잘못된 것이란 걸 깨다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온라인의 월스트리트저널'로 통했던 '더스트리트닷컴'(The street.com)이 몰락을 길로 들어섰는가 하면, 차별화된 보도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APB뉴스도 쓸쓸하게 사라져갔다.

이처럼 콘텐츠 만능주의란 상식이 깨지게 된 것은 '인터넷 광고'의 위력을 사그라들기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가 바로 콘텐츠 유료화였다. 특히 퀄리티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매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콘텐츠 유료화를 선언하고 나섰다.

인터넷신문 중 콘텐츠 유료화 전략을 고수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월스트리트저널인터랙티브(WSJIE). 전면 유료로 운영되고 있는 월스트리트저널 사이트를 이용하기 위해선 종이신문 구독자는 연간 39달러, 비구독자는 연간 79달러를 부과해야 한다. 현재 월스트리트저널 온라인 뉴스 유료 회원은 종이신문 구독자 40만명을 포함해 총 70만명에 이른다. 반면 월스트리트저널 종이신문 구독자는 180만명이다.

전면 유료화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WSJIE와 달리 살롱닷컴은 일부 유료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살롱 프리미엄 서비스는 1년 30달러, 2년 50달러로 책정돼 있다. (인터넷뉴스와 수익모델. 한국언론재단, 2001년)

아이뉴스24는 2001년 9월 17일 ‘콘텐츠 유료화’ 대열에 동참했다. 굳이 따지자면 살롱닷컴 형 일부 유료화 모델. 별도 프리미엄 섹션에 유료 기사를 모아놓고 있다. 기업회원과 개인 회원으로 나눠 마케팅하고 있으며, 아이뉴스24 수익의 주요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커지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뉴스는 공짜'라는 독자들의 심리가 워낙 강한 탓에 월스트리트저널 외에는 '돈 되는 콘텐츠'를 만드는 업체들은 드물다. 하지만 서서히 ‘좋은 정보는 돈이 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 중심에 인터넷신문들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 인터넷신문협회, 그리고 새로운 도전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인터넷신문들은 또 한번 현실의 장벽에 부닥치게 된다. 정간법에 등록된 매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선 후보 인터뷰'조차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

이 사건은 인터넷 언론들에게 뼈아픈 경험이었지만, 반대로 인터넷신문협회란 단체가 출범하는 기회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해 10월28일 아이뉴스24를 비롯해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머니투데이, 이데일리 등 9개사가 주축이 된 인터넷신문협회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당시 인터넷신문협회는 창립선언문을 통해 '그동안 이룩해 온 성과를 더욱 발전시키고 다가오고 있는 시련과 도전을 효율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인터넷신문협회를 창립한다'고 선언했다. 인터넷신문협회는 출범 첫 행사로 대선후보 합동 토론회를 개최, 텍스트와 동영상을 곁들인 차별화된 보도로 많은 유권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인터넷신문협회는 그 뒤 구시대적인 언론 규정을 바꾸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이같은 노력은 결실을 맺게 돼, 올해초 개정된 신문법에서 인터넷 언론들도 언론사로서 법적인 지위를 보장받기에 이르렀다.

인터넷신문의 위상 강화는 상대적으로 줄어든 기존 매체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중앙일보 권영빈 편집인의 '새들은 좌우 날개로 난다'는 칼럼은 당시의 상황을 잘 전해주는 글 중 하나다.

"~뒤늦은 반성이 꼬리를 문다. 주류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이 사회의 중심 보수세력들이 제 할일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미동맹에까지 금이 가는 이상한 기류가 형성되었던 게 아닌가. 주류 언론, 보수 중심세력, 또 최대 의석을 자랑하는 거대 야당이 제 몫으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류 언론은 인터넷신문에 밀리고 거대 야당은 소유 여당에 패배하는, 보수의 몰락을 자초한 게 아닌가 하는 물음이었다." (권영빈, '새들은 좌우 날개로 난다'중에서, 중앙일보, 2003. 1. 20)

중앙일보의 대표적 논객인 권영빈 편집인은 2002년 대선 직후 자신의 심경을 '자괴감'이란 말로 피력했다. 당시 그의 칼럼은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건부터 대통령 선거까지 각종 이슈에서 인터넷신문에 주도권을 빼앗긴 한 주류 언론 대표 논객의 자괴감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온-오프간 위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진단한다면, 지나친 자기 중심적 해석일까?

하지만 일찍이 존 캣츠가 예언했던 다음과 같은 말은 인터넷언론의 현 주소를 잘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저널리즘의 미래는 인터넷에서 알 수 있고 온라인 뉴스는 저널리즘의 주류가 될 것이다. 웹은 문화를 변화시키고 있으며 언어, 정보를 변화시키고 있다. 몇몇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올드 모델이 이제 사라지고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새로운 모델이 등장했다." (성동규(2002). 사이버커뮤니케이션, 서울:세계사. 153쪽에서 재인용)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그리고 남은 과제들

인터넷 언론 5년 역사는 곧 패러다임 변동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속엔 아이뉴스24라는 매체가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지나온 길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감회에 젖을 수만 있을까? 불행하게도, 이 질문에 대해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하긴 힘들다. 그만큼 아직 인터넷신문들이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굳이 규정하자면, 인터넷 저널리즘 혁명은 아직도 '미완의 혁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의 인터넷신문들이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속보와 커뮤니티 측면에서만 그럴 뿐이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매체의 특성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뒤로 한채, 하루 하루 기사들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매체 특유의 차별화된 보도, 새로운 언론 문화란 측면에선 여전히 미흡하기 그지 없다. CNN.com,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을 비롯한 미국의 인터넷신문들이 특유의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차별화된 보도를 선보인 데 비하면 한국의 인터넷신문들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새로운 매체는 항상 새로운 형식 창조를 개발해 왔다. 아직도 신문이란 올드매체의 관행에 젖어 있는 인터넷신문으로선 이 부분에 대한 처절한 자기 반성이 필요할 것이다.

또 인터넷신문 특유의 차별화된 기사 형태, 보도 방식에 대한 고민은 영원한 숙제로 남아 있다.

최근 들어 또 다른 권력으로 떠오른 포털 역시 무시 못할 존재들이다. 5년전 인터넷신문들이 무섭게 부상해 왔듯, 막강한 커뮤니티 파워를 앞세운 포털들은 지금 인터넷 저널리즘의 세대 교체를 꾀하고 있다. 미국 등에선 이미 그 위력이 증명된, 블로그를 비롯한 개인형 미디어들을 껴안는 문제도 결코 녹록한 사안이 아니다.

5년전 수많은 인터넷신문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것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그 공은 어느 새 세상을 향해 큰 소리를 외치는 권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제 한 고비를 넘어가면서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그 출발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처절한 반성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 뼈저린 반성이 뒷받침될 때만이 '인터넷신문 10주년'을 찬란한 희망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익현기자 sin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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