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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연, '버닝'의 미스터리는 그에게 있다(인터뷰①)


"이창동과 작업 망설였다…韓영화계 존중하기 때문"

[조이뉴스24 권혜림 기자] 영화 '버닝'의 벤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다. 모두가 바쁘게 수다를 떠는 모임 장소에서 그는 간간이 지루한듯 하품을 한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관용적이지만, 진지한 대화는 원치 않는다. 마음 깊이 울리는 '베이스'가 삶을 살게 하는 재미다. 그리고 과연 벤의 마음을 가장 격렬하게 진동시키는 취미가 무엇을 은유하는지, 그가 보이는 정갈한 미소 뒤엔 무엇이 있거나 없는지, 그 직관적인 의심들은 정확히 영화가 취하는 미스터리의 중심에 있다.

지난 18일(이하 현지시각) 제71회 칸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 칸의 해변 모처에서 경쟁부문 초청작 '버닝'(감독 이창동, 제작 파인하우스필름, 나우필름)의 이창동 감독과 배우 유아인, 스티븐연, 전종서가 참석한 가운데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버닝'은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 분)가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 분)를 만나고, 그녀에게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연 분)을 소개 받으면서 벌어지는 비밀스럽고도 강렬한 이야기. 일본의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이다. 지난 16일 칸에서 첫 선을 보인 뒤 현지 언론의 호평을 받고 있다.

세계 영화계가 주목하는 거장 이창동과의 작업은 스티븐연에게 영예이면서도 두려운 일이었다. 미국 작품들 속 아시아인 캐릭터들의 전형성에 허기를 느꼈던 그에게 온전한 한국인으로 상상될 수 있는 벤 역은 분명 욕심나는 캐릭터였지만, 그는 오히려 한국영화계에 대한 자신의 존중이 '버닝' 출연을 망설이게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이창동 감독이 저를 불렀을 때, 처음엔 함께 작업할 수 있으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어요. 저는 한국말을 못하니까요. 감독을 만나러 갈 때 '출연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준비했었어요. 물론 이창동 감독이 부르면 하는 게 맞지만(웃음) 저는 감독의 필모그라피를 망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한국에서 일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요. 싫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존중했기 때문이에요."

앞서 그가 출연한 봉준호 감독의 '옥자'는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영화였다. 감독, 일부 배우와 키스태프들이 한국인이었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촬영됐다. '옥자'의 케이는 교포였다. 하지만 '버닝'은 달랐다. 온전한 한국 프로덕션 영화였고 캐릭터의 대사도 모두 한국어였다. 자신의 한국어 연기가 거장 이창동의 작품에 쏠리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저는 미국인으로서 조심스러웠어요. 물론 저도 교포 역할만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건 재미 없죠. '옥자'는 미국과 한국이 함께 프로덕션을 했으니 제게 자연스러웠는데 이번엔 '내가 할 수 있을까' 많이 생각했어요. 그런데 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벤을 둘러싼 미스터리한 공기를 이해하는 것이 배우에게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이창동 감독과도 벤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철학적인 방향의 이야기를 나누며 인물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비롯해 니체의 책을 많이 읽었고, 쇼펜하우어도 공부했다. "벤은 어떤 책을 읽는 사람인지, 세상을 어떻게 보는 사람인지에 대해 그렇게 준비했다"는 것이 스티븐연의 설명이다.

"세상과 진짜로 소통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많아요. 너무 많죠. 아주 쉽게 살아서, 거의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요. 그래서 벤의 미묘한 캐릭터를 찾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벤의 어떤 면을 언제 어떻게 보여줄지에 대해선 감독과 서로 이야기하며 매 신 선택해나갔어요. 아주 자연스럽게 작업한 것 같아요."

그가 이해한 벤, '버닝'이 채 보여주지 않는 그의 정체에 대해 스스로는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묻자 스티븐연은 "비밀이라서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 아주 많이 봐야만 알 수 있는 영화인 것 같다"며 "내게 재밌게 다가온 지점은 벤이 아주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벤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다 진심이에요. 그도 외로워요. 오히려 그래서 벤은 절대 누군가와 깊이있게 재밌는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사람 같아요. 그래서 늘 누군가를 찾고 있죠. 해미와 종수가 누군가를 찾고 있듯이, 벤도 그래요.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는 것은 이창동 감독이 천재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이도 드셨고, 아주 오랫동안 필모그라피를 쌓아오신 분인데도 아직도 이 세상의 학생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런 모습을 볼 때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 속 종수와 해미에 비해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듯 보이는 벤은 관객에게 다른 두 인물보다 공감을 이끌어내기 어려운 캐릭터이기도 하다. 스티븐연은 "종수를 이해하기는 쉽다. 종수는 돈이 없고 상처받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해미 역시 한국에서 여성들의 삶이 힘든 만큼 (관객이) 다가가기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벤의 경우는 참 이해하기 힘들어요. 우리 사회 계급의 꼭대기에 있는 인물이죠. '넌 다 가지고 있는데 내가 왜 널 이해해야 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감독은 '이들도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그건 대단한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정말 기막힌 일이라고 생각해요."

스티븐 연은 이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모든 대사가 한국어로 이뤄진 배역을 소화했다. '프랑스 영화처럼'의 단편 '리메이닝 타임'에서 연인과 함께 잠시 한국을 찾은 교포 역을 맡았고, '옥자'에서도 동물구호단체의 일원 케이로 분해 슈퍼돼지 옥자를 구하기 위해 한국에 온 교포를 연기했다.

'버닝'의 벤은 출신이나 성장 배경이 말해지지 않는 인물이다. 외국어 이름을 통해 해외에 오래 살다 한국에 정착한 부유한 청년 정도로 상상해도 무리가 없는 캐릭터다. 한국어 대사를 기대 이상으로 매끄럽게 소화했지만, 당연하게도 어색한 순간들이 포착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묘한 지점들이 벤 역이 가진 미스터리한 색깔을 되려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정체를 알기 어려운 벤이라는 인물이 때로 공포와 경계의 대상이 되는 외지인의 정체성과 절묘하게 호응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번엔 연기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참 어려웠어요. 대사를 외우는 것도, 한국어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어요. 제 대본은 한국어 반, 영어 번역본 반으로 이뤄져 있었어요. 저는 한국어를 읽는 것은 잘 못해요. 너무 느리게 읽기 때문에 읽으면서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들어야 하죠. 친구에게 녹음을 부탁해 듣고 외웠어요. 힘들었다기보다, 해야만 하는 노력이었죠. 캐릭터가 되려면 그냥 자연스러워야 했어요. 외국인의 느낌이 남아있는 것이 고민이었고요."

스티븐연에게, 벤은 "세상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그 어느 곳에서도 깊은 영향을 받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세상을 믿지 않으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사고가 나도 아무 것도 아니고, 죽어도 아무 것도 아닌 거예요. '그게 뭐가 중요해?'라고 생각하겠죠. 모든 게 무의미하니까요. 그런 생각을 하는 벤에게 세상은 재미 없고 어두웠을 것 같아요."

한편 스티븐연은 지난 2017년 '옥자'로 제70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데 이어 올해 '버닝'으로 2년 연속 칸 경쟁 초청의 영예를 안았다. 제71회 칸국제영화제는 19일 폐막식을 열고 수상작(자)을 공개한다.

조이뉴스24 칸(프랑스)=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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