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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준의 이런 야구]KBO의 이방인 재일동포②


다면적인 사나이 장명부…삼미의 영웅·비극적 말년

◆너무도 개성 넘친 사나이

▲장명부(張明夫, 후쿠시 히로아키·福士敬章)

일본 돗토리현에서 태어났다. 일본프로야구에 등록한 이름은 1978년에는 마쓰바라 아키오(松原明夫), 1979년에는 후쿠시 아키오(福士明夫)로 돼 있는데 가족 간 문제로 성이 바뀌었다고 한다. 196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 1973년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해 7승을 거두며 리그 우승에 공헌한다. 1977년 고바 다케시(古葉竹識) 히로시마 감독의 요청으로 이적한다. 15승을 두 번이나 올렸고 1979·1980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히로시마 전성기에 일익을 담당하는 투수로 성장했다. 그러나 1982년 3승에 그친 뒤 방출됐다.

이 장명부가 삼미 슈퍼스타즈 캠프에 합류한 시기가 1983년 2월이었다. '전설의 팀' 삼미의 1982년 성적은 전기 10승 30패, 후기 5승 35패로 시즌 합계 15승 65패, 승률 1할8푼6리였다. 문자 그대로 참담했다. 삼미는 차마 프로야구단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조차 힘들었던 팀이다. 장명부의 삼미 입단은 1983년 야구계 최대 화제였다. 경력도 경력이지만 몸값이 어마어마했다. 계약금 1천500만엔(약 4천500만원), 연봉 2천500만엔(약 7천500만원)을 받았다. 순수몸값만 1억2천만원이었다. 여기에 세금·주택·승용차 등 부대비용도 6천만원 가량 들었다. 삼미가 지불한 비용이 모두 1억8천만원에 달했다.

당시 대기업 사원의 월급이 30만원이 안 되던 때였다. 요즘도 사회에서 연봉 1억원의 상징성은 꽤 큰 편이다. 33년 전 1억원의 가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 해 전인 1982년 초특급선수였던 OB 베어스의 박철순의 입단 당시 몸값이 4천400만원(계약금 2천만원·연봉 2천400만원)이었다. 그는 22연승이란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다. 박철순은 50% 인상된 연봉 3천600만원에 1983년 시즌 계약을 했다.

'박철순보다 더 대단한 선수'. 프로야구에 관심이 적었던 이들까지 재일동포 야구선수 장명부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각인했다. 4월 2일, 드디어 부산에서 장명부가 첫선을 보였다. 여유 있는 피칭으로 10-4 완승의 주역이 됐다. 삼미는 전년과 달라졌다. 곧 장명부의 힘이었다. 장명부는 1983년 시즌 연장전 경기를 모조리 승리로 장식한다. 입단 첫 해 무려 30승을 거둔다. 당시는 한 팀이 100경기를 소화하던 시기였다.

장명부의 '무식한' 성적은 날이 갈수록 깨지기 힘들었지만 삼미는 우승의 숙원을 이루지는 못했다. 장명부와 다른 선수들의 기량차가 너무 컸다. 장명부는 마운드에서보다 연봉협상 테이블에서 더욱 너구리였다. 장명부는 1984년 13승 20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3.30에 그쳤다. 데뷔 시즌 성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여전히 대단한 성적이었지만 그만큼 그에 대한 기대치는 하늘을 찔렀다. 삼미는 연봉삭감을 당연히 추진했지만 장명부는 완강하게 맞섰다. 동계훈련 불참에 1985년 정규시즌 들어서도 구단에 불만을 품고 태업으로 일관했다.

1985년 삼미를 인수한 청보 핀토스에게도 장명부는 다루기 곤란한 선수였다. 기량은 퇴물이 됐고, 몸값은 높으며 말은 듣지 않았다. 청보는 결국 장명부를 자유계약선수로 풀어버렸다. 1986년 1군 리그에 진입하는 빙그레 이글스가 그를 선택했지만 장명부는 1승 18패라는 처참한 성적에 그쳤다. 심지어 몇몇 선수들을 '졸개'처럼 거느리고 다니며 팀 내 파벌까지 조성, 당시 배성서 감독과 크게 충돌하기도 했다. 장명부는 1991년 마약사범으로 구속되면서 한국야구계에서 영구제명됐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마작하우스를 운영하며 생계를 꾸리던 그는 2005년 4월 13일 5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말년은 불운했지만 장명부는 패배의식에 찌들어 있던 삼미의 정서를 뒤흔들며 국면전환을 이끌어낸 영웅이기도 했다. 리그의 수준 차이를 떠나 단일 시즌 30승은 말 그대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초창기 한국야구계에 수많은 기록은 물론 각종 얘기거리를 남겼다는 점에서 그가 야구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야구발전 기여한 '이방인 아닌 이방인'

재일동포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로 생각하고, 일본문화의 가치관으로 사물을 판단했다. 한국프로야구에서 재일동포 선수 수입에 대한 득실을 계산해보면 대체로 흑자로 평가되지만 낭비로 결론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른바 '함량미달'이거나 부상 여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중개인(당시는 대리인의 개념이 없었다)의 말만 믿고 공돈을 허비한 것이다. 이런 일을 몇 차례 겪은 각 구단은 이후 일본지사를 통하거나 코칭스태프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선수를 선발했다. 전반적으로 재일동포 선수들은 프로야구 발전에 한 몫 한 점이 인정되지만 적응 및 실력 문제로 조기 방출된 뒤 일본 언론에 한국야구를 매도하는 발언을 한 선수도 목격됐다.

야구를 위해 한국으로 온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음식과 언어였다. 특히 나이 서른 안팎의 선수들은 크든 작든 저마다 문화충격에 시달렸다. 초창기 재일동포 선수들은 한국야구발전에 일정 부분 기여하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게 사실이지만 한국 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연봉, 불편한 언어 소통 등으로 인해 적지 않은 위화감을 감수해야 했다.

<끝>

조희준

조희준은 20년 이상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야구행정을 다루며 프로야구의 성장과정을 직접 지켜봤다. 국제관계 전문가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출범 당시 한국 측 협상단 대표로 산파 역할을 맡았다.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문학부 출신으로 일본 야구에 조예가 깊은 그는 ▲KBO 운영부장 및 국제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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