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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재]염기훈, '박지성과 손흥민 사이'에 산다는 것


1년 5개월 만에 대표팀 발탁 염기훈, '조연'에 충실하려 한다

[최용재기자] 누구나 '주연'이 되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냉혹한 현실은 모든 이들을 주연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모두가 주연이 된다면 오히려 주연의 가치는 떨어질 것이다. 주연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아주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주연이라는 영광을 선사한다. 많지 않은 이들에게 주어진 영광이기게 주연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고 모든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주연이 되지 못하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세 가지 부류가 있다. 한 가지 부류는 자멸이다.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주연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부류다.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무리를 하게 되고 극단적인 경우 공정하지 않은 방법을 쓰게 된다. 결론은 파멸이다.

또 하나의 부류는 포기다. 현실을 인정하고 다른 길을 찾는다. 자신이 주연이 될 만한 다른 분야를 찾아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마지막 한 가지 부류는 '최고의 조연'이 되는 것이다. 조연의 가장 큰 역할은 주연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삶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 주연에 버금가는 빛을 내려 노력한다. 주연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최고가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가치와 영역을 찾아 나간다. 주연도 가지지 못하는 자신만의 개성을 키운다. 주연이 되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이런 삶을 선택한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조연의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 한 선수가 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아마도 그는 한국 대표팀 역사상 가장 '불운한' 선수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대표팀의 주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불운한 삶이다. 한국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던 박지성, 그리고 한국 축구의 미래를 책임질 최고의 선수인 손흥민. 염기훈은 이 두 선수 사이에 끼어 있다.

그의 삶이 그렇다. 염기훈은 1983년생으로 1981년생 박지성과 비슷한 시대에 축구를 했다. 염기훈과 박지성의 포지션은 대부분 겹쳤다. 그렇기에 염기훈은 항상 박지성의 그늘에 가릴 수밖에 없었다. 박지성은 너무나 위대한 선수였다. 염기훈 역시 훌륭한 선수다. K리그에서는 항상 최고의 선수였다. 그렇지만 대표팀에 가면 이야기는 달랐다. 박지성은 염기훈이 넘기 힘든 큰 산이었다. 박지성은 영원한 주연이었다.

염기훈에게는 항상 박지성과의 주전 경쟁이라는 숙제가 있었다. 그런데 사실 풀 수 없는 숙제였다. 박지성이 건재하다면 염기훈은 항상 조연이었다. 이는 엄연한 현실이었고, 염기훈이 출전했던 메이저대회를 보면 그 현실을 느낄 수 있다.

2007년 아시안컵에서 염기훈은 거의 모든 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이유는 박지성이 부상으로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011년 아시안컵에서 염기훈은 거의 모든 경기에 교체 출전했다. 2011년에는 대표팀에 박지성이 있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염기훈은 다행스럽게도 박지성과 포지션이 겹치지 않아 함께 그라운드를 누빌 수 있었다. 염기훈은 조별예선 3경기 모두 선발 출전하며 한국의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에 큰 힘을 보탰다. 그런데 이 월드컵은 염기훈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B조 2차전 아르헨티나전에서 나온 염기훈의 실수 하나로 그는 비난의 중심에 서야만 했다. 16강 진출을 함께 한 공신이었지만 이 경기의 실수 하나로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축구팬들에 회자되고, 일부는 여전히 조롱하고 있다.

시간이 흘렀고, 염기훈의 대표팀 인생에서 너무나 큰 산이고 경쟁자였던 박지성이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그럼 염기훈은 주연이 됐을까. 아니다. 염기훈은 여전히 조연이다. 대표팀에 간혹 발탁됐지만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국가대표 염기훈은 임팩트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 손흥민이라는 또 한 명의 최고 선수가 포지션 경쟁자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2014 브라질 월드컵, 2015 호주 아시안컵 모두 손흥민이 주연 선수였다. 박지성처럼 손흥민도 염기훈이 현실적으로 넘을 수 없는 산이다. 올 시즌 K리그 득점 1위, 도움 1위를 달리며 약 1년 5개월 만에 다시 태극마크를 단 염기훈이지만, 그는 대표팀에서 다시 조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박지성 시대의 조연과 손흥민 시대의 조연의 삶은 조금 다르다. 시대가 바뀔 동안 염기훈도 많은 경험과 연륜이 쌓였다. 이제는 '삶의 깊이'가 달라진 것이다. 보는 눈도, 가지고 있는 생각도 넓고 깊어진 것이다.

조력자의 삶은 같지만 이전에는 주연이 되겠다는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는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은 주연이 되겠다는 욕심은 없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출전에 대한 갈망도 없다. 염기훈의 목표는 단 하나. 지금 이 순간 대표팀의 승리, 자신이 그 승리에 어떤 방식으로도 보탬이 되는 것이다. 주전 경쟁, 경기 출전, 대표팀에서의 명예회복은 현재 염기훈에게 무의미하다. 조연의 삶을 택한 염기훈은 모든 것들을 내려놓았다.

8일 파주 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파주NFC)에서 만난 염기훈은 이전 대표팀 소집 때와는 조금 다른 특별한 의지를 보였다. 염기훈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지만 차분했고 여유로웠다. 축구 선수로서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염기훈이었다.

염기훈은 "이전에 대표팀에 발탁이 되면 경기를 뛰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축구를 오랫동안 하다 보니 이제는 주전보다 리저브 역할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느꼈다. 이번 대표팀에서는 내 역할에 충실할 것이다. 주전 경쟁보다는 후보에 있을 때도 주전 선수들이 리저브 선수들을 믿고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경기에 뛰지 못하더라도 팀에 힘을 불어 넣어줄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특별한 의지를 드러냈다. 주연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조연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의미다.

그리고 염기훈은 2018 러시아 월드컵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염기훈은 "다음 월드컵에 나가야겠다는 갈망은 없다. 나도 나이가 있다. 다음 월드컵에 출전하고, 월드컵을 준비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지금 내 위치에서 얼마나 감독님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8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 못해도 염기훈은 상관이 없다. 지금 현 위치에서 한국이 러시아 월드컵 본선에 갈 수 있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됐다. 더 먼 곳, 더 높은 곳으로 주연들이 탈 없이 잘 향할 수 있게 조연 염기훈은 희생을 택했다.

조력자로서의 삶이다. 조연 없이 빛날 수 있는 주연은 없다. 이것이 국가대표 염기훈이 조연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다. 조연이지만 부끄럽게 살지 않았다. 포기하지도, 시기하지도, 방황하지도 않았다. 내려놓으면서 더욱 단단해졌다. 박지성과 손흥민 사이에서 힘겨운 길을 걸어왔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행복했던 조연의 삶은 박수 받기에 충분하다. 분명 '국가대표 염기훈'의 가치는 넓고, 크다.

조이뉴스24 파주=최용재기자 indig80@joynews24.com 사진 정소희기자 ss082@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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