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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현]화학물질 누출, 불안감도 지나치면…


"사고의 경중과 상관없이 마녀사냥 식 범죄자 비난 풍토도 문제"

불산·혼산·염소 등 각종 화학물질 누출 사고가 잇따르면서 관련 기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해당 기업들은 "사고의 경중이나 피해 유무와 상관 없이 마녀사냥 식으로 범죄자로 몰아가는 게 아쉽다"며 억울해 하고 있다.

대개 '은폐시도'나 '늑장신고'라는 비판이 뒤따르는데, 산업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불가피할 수 있다. 후속 방제조치나 고용자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가 우선적으로 이뤄졌다면 불법도 아니다. 이들 기업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닌 것이다.

이들 기업이 억울해 하는 지점은 누출 사고와 관련된 법 규정을 지키고 추가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해 방제 조치를 우선적으로 했는데도 마치 범법 행위가 있었던 것처럼 비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불필요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더 큰 사고를 은폐할 수도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게다가 과잉 보도가 인근 지역 주민의 불안감을 필요 이상으로 조장한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22일 충북 청주공장 M8 사업장에서 염소가스 누출 사고가 있었던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애매한 법 조항 때문에)신고의 의무가 있는지 없는지 잘 판단이 안 섰다"며 "인명 피해도 없었고 극소량이 샜기 때문에 더 그랬다"고 말했다.

여론의 포화를 맞았던 SK하이닉스는 28일 충청북도 청주 SK하이닉스 제3공장에서 작업 중이던 직원이 감광액 1리터들이 병을 옮기던 도중 바닥에 떨어뜨려 깨뜨리자 이번엔 즉시 신고에 나섰다.

그러나 반도체 제조 시 웨이퍼 원판 표면 위에 미세한 회로를 그리기 위해 사용되는 감광액은 유해화학물질관리법으로 봤을 때 유해화학물질이 아니며, 단순 노출로는 인체에 유해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시 신고 대상 물질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듯 '늑장신고'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묻기에는 신고에 대한 법 규정이 애매하다.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의 제40조 2항에 따르면, 유해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자는 해당 유해화학물질로 인한 사고로 사람의 건강 또는 환경에 관한 위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으면 관할 지방자치단체, 지방환경관서, 국가경찰관서, 소방관서 또는 지방고용노동관서에 신고해야 한다.

한 업체 관계자는 "법 자체가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으면 신고하라는 것으로 애매하게 규정돼 있다"며 "업체에서 자체적으로 충분히 확산을 방지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발견해서 조치를 취한 뒤 신고를 했는데 이를 '늑장신고'라고 하니 난처하다"고 말했다.

또 현행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 제4조에선 사업주가 중대 재해가 발생한 사실을 알게 된 경우에는 지체없이 ▲발생 개요 및 피해 상황 ▲조치 및 전망 ▲그 밖의 중요한 사항을 관할 지방고용노동관서의 장에게 전화·팩스, 또는 그 밖에 적절한 방법으로 보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같은 법의 시행규칙 제2조에 따르면 중대 재해는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재해 ▲3개월 이상의 요양이 필요한 부상자가 동시에 2명 이상 발생한 재해 ▲부상자 또는 직업성 질병자가 동시에 10명 이상 발생한 재해로 명시되고 있다.

이같은 현행법을 감안할 때 최근 잇따른 화학물질 누출 사고 중 중대 재해에 해당하는 사고는 삼성 반도체 사업장의 불산 누출 사고 한 건에 불과하다. 이 또한 보고 의무가 발생하는 시점을 사고 시점이 아니라 사망자가 발생한 시점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와 관련 삼성전자 측도 지난 1월 열린 동탄 주민설명회에서 신고 시점이 늦어진 이유에 대해 "법에 따라 독성·화학물질 등이 유출돼서 환경에 위협요소가 우려되면 즉각 신고를 해야 한다고 이해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사태가 사람이 다치는 사태로까지 비화되기 전에는, 당시 현장에 있던 작업자들로선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잘못이 있다. 유출이 됐다고 하더라도 외부 환경의 위해 우려가 있는 사고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대처가 가능한 상황이라고 판단됐던 사고"라고 덧붙였다.

고용안전부 관계자 역시 "삼성전자 불산 누출 사고의 경우,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 제4조에 따르면 사업주가 사망자가 발생한 것을 확인한 시점부터 보고 의무가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며 "일부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16시간 늑장보고 수준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업체들은 이번 사고를 장비·부품 노후화 때문이라기보다는 연결·용접 부위에서 우연히 발생하는 일로 판단하고 이중배관 등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한 업체 관계자는 "누출 사고 자체는 신고 여부를 떠나서 거의 없던 일"이라며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면 작업자들이 일을 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지난 22일 소량의 폐 혼산액이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한 LG실트론의 구미 2공장은 80년대 후반에 설립됐으나 이번에 사고가 있었던 배관은 지난 2009년에 교체한 것이다.

LG실트론 관계자는 "사고가 있었던 배관은 법적으로 수명이 있는 제품은 아니지만 10년에 한 번씩 교체하고 있는 부품"이라며 "용접 부위에서 미세한 구멍이 생기는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역시 지난 1월 발생한 삼성전자 화성 반도체공장 불산 누출 사고가 부품 노후화라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다. 밸브 작업 시에는 내부에 별도의 코팅 작업이 돼 있을 뿐 아니라 사고가 일어난 라인보다 더 오래된 밸브도 문제없이 정상적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작업자 사망 사고가 있었던 삼성전자 역시 지난 26일 경기도 화성시 동탄 반석아트홀에서 열린 주민설명회를 통해 전체 배관에 대한 특별점검을 실시하고 가스와 화학물질 누출 여부를 24시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존 시스템은 약품공급실 내에서만 감지할 수 있었지만 이를 종합통제실로 연결해 관리한다는 구상이다.

한 사고업체 관계자는 "향후 이중배관을 해서 유해화학물질이 바닥에 안 떨어지고 배관 안에 있도록 하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배관 밖으로 유출이 되는 경우 자동 알람이 되는 시스템을 마련할 계획"이라며 "결국 다시 한번 점검을 하고 이중·삼중 안전장치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나로호 3차 발사 시도가 러시아에서 생산한 고무 성분의 실(seal) 이상으로 연기되자 발사 작업 총괄을 맡았던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조광래 단장은 "나로호 발사체가 성공하기 위해선 600단계에 이르는 세부과정들이 다 성공해야 하며 헬륨가스 주입은 240번째 쯤 되는 단계"라며 "러시아의 책임이라고 일방적으로 전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파트너를 감싸 안았다.

인명피해가 없었던 사고까지 기업들이 부덕으로 떠안을 일은 아니다.

박계현기자 kopila@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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