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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자본을 쌓을 때다


박태웅 IT칼럼니스트

서울역에는 검표원이 없다. 개찰구는 열려 있다. 승객들은 멈춰서서 손에 든 짐을 내려놓고 차표를 꺼낼 필요없이 자유롭게 들어간다.

원래부터 그랬던건 아니다. 검표원이 개찰구에서 손님들이 내미는 기차표에 펀칭기로 구멍을 내던 때도 있었다. 열차를 타고 있으면 검표원이 앞뒤로 다니며 가끔 손님들에게 표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다 어느날 검표원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국이 갑자기 선진국이 되어버린걸까? 혹은 다른데선 몰라도 서울역에만 가면 사람들의 양심이 느닷없이 작동해서?

효율적인 IT시스템과 현명한 운영이 제대로 만난 결과다. 요즘도 기차안에 승무원은 다닌다. 다만 팔리지 않은 좌석에 사람이 앉아 있을 때만 표를 보여달라고 요청한다. 차량별 좌석 판매내역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기기가 승무원의 손에 들려 있기 때문이다.

예전의 시스템이 몇명의 무임승차자를 잡기 위해 모든 승객들을 불편하게 했다면, 새 방식은 거의 대부분의 승객들을 아주 편하게 하는 대신에, 잡힌 무임승차자에게는 높은 비용을 치르게 한다. 전수 검표를 하느라 생기던 개찰구의 길게 늘어선 줄도, 개찰하는데 들던 시간과 인건비도 비할 바 없이 줄었다. 온갖 꾀를 써서 무임승차를 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겠지만, 그 돈을 다 모아봐야 이 줄어든 몫의 아주 일부다.

슬프게도, 우리 사회에서 수작업 전수 검표는 단지 서울역과 지하철에서만 없어진 듯 보인다.

예컨대 많은 박사들과 고급 연구원들은 지금도 연구대신에 영수증에 풀칠을 하느라 숱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몇 달마다 한 번씩 연구 결과 보고서를 정리하느라 툭하면 밤을 새웠어요. 연구소 내부 보고회에서 발표할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도 만들었고요. 연구비 회계 처리도 해야 했죠. 그동안 쓴 영수증 정리하고, 남은 연구비 정산도 했어요."

미국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마치고 돌아와 정부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김모(34)씨는 요즘 귀국을 후회하고 있다. 각종 행정 업무에 파묻혀 정작 연구에는 손도 못 대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우리나라 대학과 정부 연구소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현실적 이유로 과도한 행정 업무와 상명하복식 연구실 문화, 단기 실적 중심의 평가 시스템을 지적한다.

서울 사립대의 한 교수는 "부처마다 연구비 관리 규정까지 다르다 보니 새 과제를 맡을 때마다 행정 절차를 위한 스터디를 별도로 해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서울역과 다른건 이뿐이 아니다. 이렇게 모든 탑승객들을 괴롭히지만, 정작 발각되면 징계는 솜방망이다.

예를 들어 '와셋'을 보자. '와셋'은 돈만 내면 제대로 된 심사 과정도 없이 학술대회 발표 기회를 주고 논문을 실어 주는 사이비 학술단체다. 보도에 따르면 국가 별로 와셋 학술지 논문 투고 또는 학술대회 참석 건수를 집계한 결과 한국은 세계에서 5위였고, 국내는 서울대가 100건으로 1위를 차지했다. 국내 명문대 대부분이 상위 10위권에 들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건 지난달 중순께다. 허나, 지금까지 서울대를 비롯해 국내 명문대에서 이 교수들을 징계하거나 내쫓았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발각이 되어도 탈이 없는건 이뿐이 아니다. 200억대의 주식을 남의 이름으로 감춰 수십년을 보유해왔던 빙그레 김호연 회장은 금감원으로부터 과징금 부과나 수사기관 통보도 하지 않는 ‘주의’나 ‘경고’에 불과한 조처를 받았다. 그전에는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800억대 주식을 남의 이름으로 보유하고 있다가 적발되고도 같은 조처를 받았다. 명백히 금융실명제법 위반이고, 탈세 범죄인데도 그렇다. 서울역과 전철에선 티켓을 안끊고 무임승차를 하다 걸리면 10~30배의 벌금을 문다.

국회에선 ‘특활비를 공개하라’는 법원의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매체에 따르면 “국회 관계자는 국회 특활비 등 정보공개 소송에서 국회가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항소하는 이유에 대해 '지금 바로 20대 국회 전임 국회의장(정세균) 특활비를 공개하면 전임 의장 때 이뤄진 일들이 공개되면서 곤란해질 수 있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라고 한다. 여기서 곤란해지는 사람이 국민은 아닐 것이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전형적인 ’들켜도 별 일 없다’의 국회판이다.

서울역을 다시 생각해보자. 몇명의 무임승차자를 잡기 위해 모든 승객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고, 거의 대부분의 승객들을 아주 편하게 하는 대신에, 잡힌 무임승차자에게는 높은 비용을 치르게 할 수도 있다. 물론 시간과 비용도 후자가 비할 바 없이 줄어든다.

최악은 모든 승객들을 불편하게 하면서, 정작 잡힌 무임승차자에게는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서울역을 제외한 이 사회의 다른 모든 곳들이 사실상 최악의 옵션만을 가지고 있다면 이건 너무도 기괴한 일이 아닌가.

인적자본과 물적자본에 더해, 한 사회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꼭 필요한게 바로 ‘신뢰자본’이다. 선진국과 중진국을 가르는 결정적인 ‘절대반지’. 거의 대부분의 승객들을 아주 편하게 하는 대신에, 잡힌 무임승차자에게는 높은 비용을 치르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반지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사전 규제는 과감히 풀되, 징벌은 눈이 튀어나올만큼 과감히 하자. 서울역과 지하철은 우리 사회에서도 이것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을 실증한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해서라도 ‘발각된 무임승차자’는 엄벌해야 한다. 그래야 대부분의 승객들이 편하게 다닐 수가 있다. ‘영수증 풀칠’대신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박태웅 IT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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