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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기술로 무장한 촛불 혁명, 속도 87년의 3배


모바일 통한 연결사회, 지도부 없이도 민심 형성·실행 이어져

[아이뉴스24 채송무기자]2016년, 촛불을 든 국민들이 우리 사회의 변화를 위해 나섰다. 매주 수백만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평화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외쳤고, 결국 국회는 압도적으로 박 대통령의 탄핵안을 가결했다.

촛불이 온 사회를 뒤덮기까지 불과 2달 여의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최순실 국정농단이 온 나라를 뒤흔든 이후 10월 29일 1차 촛불집회에서는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지만, 백남기 농민의 추도제를 겸한 11월 5일 2차 촛불집회에서는 그 10배인 30만명이 촛불을 들었고, 11월 12일 3차 촛불집회에는 100만 인파가 광화문에 운집했다.

이후 추위와 궂은 날씨 속에서도 이같은 추세는 계속됐고, 시간이 지날수록 촛불의 동력이 상실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더욱 강고해졌다.

이는 촛불 국민들이 다른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연결된 시민들은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보다 쉽게 전달하고 하나의 의견을 모을 수 있게 됐다.

뿐만 아니라 SNS를 통해 일반 시민이 정치인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정보를 모을 수 있게 됐다. 끊임없이 정치적 셈법으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저울질했던 정치권을 시민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채찍질했다. 탄핵 가결의 키였던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을 움직인 것도 모바일을 통해 연결된 촛불 국민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로 불꽃 당긴 6월 항쟁, 6개월 걸려

또 다른 혁명인 87년 6월 항쟁을 보면 이같은 IT기술의 발전이 얼마나 민심의 형성에 빠르게 작용했는지 알 수 있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숨지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언론의 보도를 통해 커지기 시작한다.

다음날 중앙일보 사회면에 '경찰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짜리 기사로 실렸다. 경찰은 자체 진상규명 결과라며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는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을 했고, 국민의 분노는 커졌다.

그러나 부검 결과 박종철의 시체는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동아일보의 취재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확대된 원인 중 하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했고, 민심은 격앙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되었다고 발표해 더욱 분노가 커졌다. 여론은 폭발했고, 재야단체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간 분열돼 있던 민주세력들이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됐다.

이후부터 각 대학을 중심으로 시위의 열기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 직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것은 전두환 정권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상징이 됐다.

6월 10일 서울시내 곳곳에서 집회가 열린다. 경찰이 시위대들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는 가운데 일부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하면서 소위 명동성당 농성 투쟁이 일어났다. 6월 18일에 열린 최루탄 추방대회에는 전국적으로 150만명의 시위대가 모였고, 정권은 위기에 처했다.

화이트칼라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넥타이부대가 시위에 참여하면서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고, 결국 노태우 후보의 직선제 수용 선언으로 전두환 정권은 타협을 택했다.

◆SNS 통해 참여 독려하고 결속력 다져…가상 집회도 등장

6월 항쟁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6개월 이상 소식이 전파되고 민심이 형성되는 과정을 거쳤다면 IT 기술의 수혜를 입은 촛불국민은 달랐다. 마땅한 지도부가 없었지만, 촛불국민들은 하나의 목소리를 형성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시민들은 채팅 앱이나 SNS를 통해 서로 집회 참여를 독려하고 결속력을 다졌다. 현장에서는 집회 상황을 사진과 동영상 등으로 실시간 전달 및 공유했다. 페이스북 라이브를 통해 1인 개인방송을 하며 현장의 생생한 열기를 타인에게 전달하고, 경찰의 과잉 대응 등을 견제하기도 했다.

탄핵안에 머뭇거리는 정치인에게 직접 압박을 넣는 직접 민주주의의 성격을 보이기도 했다. 탄핵에 반대하거나 머뭇거리는 의원들은 시민들의 문자세례를 받았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지역 국회의원을 카톡 채팅 단체창으로 초채해 탄핵 동참을 요구하기도 했다.

국회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는 핵심 증인들의 불참과 모르쇠 답변, 국정조사의 법적 한계가 보이자 실시간으로 시민들이 결정적 제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 때문에 최초 '최순실을 모른다'는 답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 가상집회도 나왔다. 바쁜 일상으로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이 인터넷 가상집회장으로 모여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서울대 동문 7천200명으로 구성된 박근혜 퇴진 서울대학교 동문비상시국행동은 '온라인 촛불집회'라는 가상 집회를 열었고, 퇴진 시위 모바일 앱도 등장했다.

이같은 IT기술을 바탕으로 한 모바일 직접 민주주의는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 상당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정보통신과 모바일 기술을 바탕으로 집약된 국민들의 의견은 정치인들에게 보다 쉽게 전달돼 의사에 반영될 수 있게 됐다. 촛불과 스마트폰을 양손에 든 국민들의 직접 민주주의 시대가 꽃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채송무기자 dedanh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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