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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산업, 가자 세계로/도쿄리포트-3]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야망을 배운다"


 

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배워야 하는가.

일본은 15세기 말부터 100여년간 전국시대를 겪었으며 전국에서 300명에 이

르는 군웅이 각축을 벌이던 난세를 겪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처절한 투쟁의 와중에 도태되면서 역사의 그늘로 사라졌

다.

가까스로 천하를 노릴 자리에 도달한 무장은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우에

스기 겐신(上杉謙信),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

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비롯한 6~7명에 지나지 않았다.

hspace="10">결국 노부나가가 천하의 패권을 잡았지만 친구에게 배반당해

자결하게 되고, 이어 히데요시가 천하의 패권을 잡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아

니었다.

역사가들은 16세기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3인방으로 오다 노부나가(카리

스마), 도요토미 히데요시(지략), 도쿠가와 이에야스(인내)를 꼽는다.

이들 중 최고 경영자의 유형을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조사하면 단연 오다

노부나가가 떠오르지만, 조사 대상을 기업인으로 한정시키면 도쿠가와 이에

야스가 1위에 오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7세기 초 난세를 평정하며 패권을 잡은 후 그가 사용

했던 말과 행동이 근세 일본인이 생각하는 '예'(禮)로 굳어졌다.

물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통치철학으로 '예'의 변형인 무사도를 강요하기

도 했다. 도구카와 이에야스의 육체는 죽었지만 정신은 지금도 일본 기업인

들의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다.

일본 기업인들은 힘없는 영주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의 패권을 잡

는 과정을 되짚어 보면서 자신들의 포부를 현실화시킬 칼날을 날카롭게 다

듬고 있다.

또 '아리가토 고자이마스'와 '스미마셍'을 무기로 가상 적의 정보를 모아

내재화시키고 있다.

일본의 중소기업 벤처 종합 지원센터조차 자국 벤처기업인에게 새로운 거

래 상대에 사업을 이야기할 경우 비밀 유지 계약을 맺는 것과 회의내용 기

록 등을 당부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현재 일본에 진출해 있는 한국벤처기업들은 대부분 솔루션 업체

로, 한국이 지난 2년동안 쌓았던 노하우를 '서류화'이란 이름으로 넘기고

있다.

따라서 짧은 기간에 푼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일본 IT 시장의 패권을 잡는

것이 목표인 벤처기업인이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경영 철학을 배워야 한

다.

가네코게이요(金子景予) 산업카운세라 사장은 "일본 말을 안다고 일본인을

아는 것은 아니다"며 "일본인이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지 않으려면 일본 비

즈니스를 포기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 이길 수 없다면 철저히 굽혀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42년 지금의 아이치(愛知)현인 미카와(三河)의 오카

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명은 다케치요(竹千代).

지방 토호로 출발한 마쓰다이라 가문은 전국의 풍운에 편승해 차차 인근 지

방을 공략해 영지를 넓히며 7대째인 기요야스(淸康) 대에 이르러 오카자키

성을 본거지로 하여 미카와 일대를 거의 장악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확장은 불가능했다. 동쪽에 있는 이마가와(今川), 서쪽

에 있는 오다(織田) 양대세력으로부터 잇따라 공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

다. 그로 인해 존립마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히로타다 대에 이르러 마쓰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밑에 들어갔다. 히

로타다는 영지 보존을 약속받는 대가로 그의 아들인 다케치요를 인질로 보

내게 된다.

다케치요(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질 생활은 처음부터 파란을 불러일으켰

다. 다케치요를 호송하던 히로타다의 가신이 돈에 매수돼 다케치요를 오다

쪽에 넘기고 만 것이다.

오다 측은 히로타다에게 사자를 보내 이마가와와 관계를 끊지 않으면 다케

치요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히로타다는 "자식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이마가와와 맺은 우의를 배신

한다면 미카와 무사로서 체면이 서지 않으니 다케치요를 죽이든 말든 마음

대로 하라"고 단호하게 응답했다.

사실 무사의 체면이란 표면적인 구실일 뿐, 아들의 생명을 잃는 두려움보다

도 이마가와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다 측은 다케치요를 죽이지 않았고 2년 후 이마가와 측과 인질을

교환하며 석방했다.

석방된 며칠 후 그의 아버지가 자객의 칼아래 쓰러져 다케치요가 가문을 승

계했지만, 그의 배신을 두려워한 이마가와측이 성주 신분인 그를 순푸(駿

府)로 끌고가 12년동안 인질로 삼았다.

이마가와측은 전투가 있을 때마다 예외없이 그와 그의 가신들을 최전방에

투입했다.

소모품인 그들은 싸움터에서 비록 인질이기는 하나 강인하다는 점을 보이

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 그가 용감하게 싸운 것은 이마가와 가문을 위해

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는 2중, 3중으로 묶인 속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 반드시 때

가 온다고 믿었다.

14년에 걸친 인질 생활은 그에게 놀라운 인내력과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하는 집념을 제2의 천성으로 각인시켰다.

◆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라

다케치요는 13세 때 성묘를 위해 잠시 자기 영지로 돌아와 가신들의 충성

을 확인한 후 이듬해 1월 순푸의 영주인 이마가와 요시모토(義元)의 조카딸

과 관례(冠禮·결혼)를 올리는 것과 동시에 '모토야스'(元康)로 이름을 바

꾸었다.

이마카와 측은 모토야스를 일족의 여자와 결혼시킴으로써 마쓰다이라 가문

을 이마가와 가문에 복속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1560년 운명은 그를 전혀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이해 5월 요시모토는 숙원이던 패권 장악을 위해 수도인 교토를 향했다. 이

때 길목인 오와리(尾張)를 막고 있는 오다 군을 공격하기 위해 모토야스에

게 선봉을 맡겼다.

모토야스는 적직 깊숙히 침투해 하루만에 마루네(丸根)성과 오타카(大高)성

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명령이 도착하지 않았다.

구쓰카케(沓掛)에서 오타카로 향하던 이마가와 군단의 주력부대가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오케하자마(桶狹間)의 산속에 접어들었을 때 오다 노부나가

군대가 기습공격을 해 요시모토를 죽였기 때문이다.

요시모토의 죽음은 모토야스가 이마가와의 구속에서 해방되는 절호의 기회

였지만 모토야스는 곧바로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마가와 군이 도주한 뒤 미카와의 최전선을 홀로 지키며, 요시모

토 공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복수전을 벌여야 한다며 오다 쪽의 성채

를 닥치는 대로 점령했다.

세상은 이것을 보고 모토야스의 신의에 감탄했지만 모토야스는 자신의 영지

를 확장하는 명분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요시모토가 죽었다고는 해도 그의 위협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어서 모토

야스는 이마가와에 대해 성실한 태도를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빈틈없이 순푸

의 허와 실을 정탐했다.

노부나가가 모토야스에게 동맹을 제의한 것은 이 무렵.

원래 신중한 모토야스였으나 이때 가장 신중했다고 한다. 자칫 잘못하면 모

처럼 손에 넣게 된 미카와 전역를 잃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빼앗길지도

모른다.

가신들은 대부분 오다에 비해 이마가와가 훨씬 더 강대하다는 이유를 들어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반대했다.

또 이에야스의 부인이 이마가와 혈족이라는 점과 가신들의 처자가 아직 순

푸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의 수장인 우지사네보다 오다의 수장인 노부나

가의 기량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어디까지나 실리를 중시하는 인물이다. 물론 의리도 존중하지

만, 그의 의리는 인정을 우선하는 감상적인 의리가 아니라 실리를 동반한

신의였다.

그는 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은밀히 노부나가와 손을 잡았지만 겉으로

는 이마가와의 충실한 수족인 양 행동했다.

그리고 그는 1563년 봄, 별안간 이마가와 쪽의 우에사토(上鄕) 성을 공격

해 함락했다.

이때 우지사네는 속은 것을 알고 격분한 나머지 모토야스의 장인에게 자결

을 명하고 인질로 남아 있던 모토야스 가신의 처자들을 학살했다.

그러나 이 신경질적인 보복이 이에야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복수전을

펼 구실이 생긴 것이다.

이때서야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과 단교를 선언하며 이름마저 모토야스

에서 '이에야스'로 바꾸고 독립을 선언했다.

◆ 조직을 신뢰하라

이에야스의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오와리 전투에서 요시모토 군이 대

패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은 이에야스가 전투를 치룬 다음날 저녁이었다.

이에야스는 깜짝 놀랐다.

당황한 가신들은 "패전이 확실한 상황에서 전초 기지를 지킨다는 것은 어리

석은 일"이라며 "속히 군사를 정비해 오카자키로 돌아가야한다"고 주장했

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경솔하게 판단하면 안 된다. 싸움터에는 유언비어가 따

르기 마련, 이것은 혹시 적의 모략인지도 모른다. 교란전술에 휘말려 성을

버리고 도망한다면 후세까지 웃음거리로 남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때 숙부인 미즈노 노부모토(水野信元)가 사람을 보내 요시모토의 패배를

알려왔다.

숙부는 노부나가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이에야스의 적이 되어 참가했으나 조

카의 안전을 위해 속히 철군할 것을 권했지만 이에야스는 "싸움터에선 숙부

라도 믿을 수는 없다"며 일축했다.

세번째로 오타카 성으로 달려온 것은 그의 중신인 도리이 타다요시(鳥居忠

吉)가 보낸 부하였다.

타다요시는 서신을 통해 전투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즉각 철수하라고 권

했다. 이때서야 이에야스는 마음을 결정했다.

◆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라

미카와에 기반을 다진 이에야스의 다음 목표는 이마가와의 비옥한 영지였

다.

그는 1568년 도토우미(遠江)로 진공을 개시하여 그해 겨울 히쿠마(引馬)를

점령하고 이듬해 5월 가케가와(掛川)를 공략해 우지사네를 이즈(伊豆)로 몰

아냈다. 그리고 1570년에는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오카자키를 떠나 히쿠마

로 옮겨 그곳을 하마마쓰(浜松) 성으로 개명하고 적극적으로 이마가와 공략

에 착수했다.

이마가와의 영지는 당시 일본 최강인 고슈(甲州) 군단을 거느리고 있던 북

부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도 노리고 있었다.

신겐은 교토 부근을 장악한 노부나가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와 대립하게 된 것을 기회로 반(反) 노부나가 전선을 형성한 후 그 선

두에 서서 교토 진입을 꾀하고 있었다.

따라서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이에야스와 신겐의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었

다.

이에야스와 신겐은 스루가와 도토우미, 미카와 북부 등에서 산발적인 전투

를 벌이다 1572년 정면으로 맞붙었다.

이 해 12월 신겐은 4만3천의 대군을 이끌고 도토우미에 침공해 후다마타성

과 요시노성을 함락하고 하마마쓰 북쪽의 미카타가하라(三方原)에 진을 쳤

다.

작전회의에서 장수들은 전력의 차이를 이유로 성에 들어가 농성하자고 주장

했고, 원군으로 온 오다의 장수들도 "겐신이 비록 싸움을 도발한다고 해도

결코 대응하지 말라"는 노부나가의 의향을 전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신중하던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강경히 출격을 명했다.

지금까지 패배한 적이 없는 30세 청년의 혈기였다.

이에야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학익진(鶴翼陣)을 펼치고 겐신의 공격

을 기다렸다. 학익진은 병력을 횡렬로 전개시키는 대형으로 적보다 우세할

때 적을 포위해 싸우는 포진이다.

겐신은 이에야스의 포진을 보고 웃으며 어린진(魚鱗陣)을 펼쳤다. 이것은

물고기 비늘을 겹친 것 같은 종대로, 진형 중앙부가 삼각형의 꼭지점처럼

돌출해 있다. 이 대형은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에 맞서 결사적인 돌격을 감

행할 때 쓰는 전법이다.

전투가 벌어지자 전의를 상실하고 있던 오른쪽 날개의 노부나가 군이 무너

졌다.

신겐의 전법은 노도와 같은 인해전술로 창과 칼로 무장한 보병대가 공격을

감행한 뒤 기마대가 돌격하여 적을 짓밟는 방식이다.

처참하께 패배한 이에야스는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와 하마마쓰 성으로 퇴각

했다. 이 패배는 이에야스의 전생애를 통해 유일한 패배였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신겐은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멸망이 목전에 있다고 장

담했지만 이듬해 4월 병을 얻어 진중에서 사망한다.

역사 속에 만약은 없지만 신겐이 2년만 더 살았어도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이에야스는 한낱 이름없는 영주에 지나지 않았을 말할 정도로 다케다 신겐

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에야스는 신겐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가쓰요리(勝賴)와 대결했다.

1575년 4월 가쓰요리는 1만5천의 군사를 이끌고 500의 미카와를 침입했다.

그러나 함락 직전에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 3만8천이 달려와 성의

서남쪽 시타라가하라(設樂原)에 포진했다.

가쓰요리 군의 장수들은 우선 나가시노 성을 점령하고 여기서 지구전을 벌

이자고 헌책했으나, 가쓰요리는 아버지가 지휘했던 마카타가하라 전투처럼

주력끼리 맞붙어 한번에 적을 섬멸하려고 했다.

가쓰요리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하기 위해 약간의 군사만 남기고, 시타라가

하라에 전군을 진출시켰다.

가쓰요리군의 전법은 여전히 인해전술이었다.

이에 대해 도쿠가와와 오다의 연합군은 지난번 패배를 면밀히 분석해 진지

전면에 호를 파고 3중으로 대나무 울타리를 세워 기마대의 공격을 차단한

후 총포대로 맞선다는 새로운 전법을 마련했다.

21일 새벽 가쓰요리 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눈앞에까지

몰려온 돌격대가 울타리에 막혀 우왕좌왕할 때 기다리고 있던 연합군의 3

천 총포대가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 결과 가쓰요리 군은 용장을 대부분 잃고, 내리막길을 걷다가 멸망했다.

◆ 적 전력을 소모시켜라

철저한 지배와 통치를 지향하는 이에야스는 65만 석의 큰 영지를 가지고 나

라 한가운데에 버티고 있는 도요토미 히테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가장 골

치거리였다.

도요토미 가문은 쇼균에서 지방의 다이묘로 전락했으나 영향력은 상실하지

않았고 막대한 양의 금괴와 금화를 비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각지의 사찰을 재건·수축하여 죽은 아버

지의 명복을 빌라고 권유했다. 이에야스의 의견에 사사건건 반대하던 히데

요시의 부인 '요도'도 선뜻 응했다.

그녀는 신앙심이 깊다기보다는 미신에 빠져 있었다. 이리하여 오사카 쪽에

서는 세쓰(攝津)의 덴노(天王) 사를 비롯하여 무려 20개가 넘는 사찰과 신

사에 시주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요토미 가문은 호코(方廣) 사에 거대한 대불(大佛)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대불 건조는 돌아가신 타이코 전하의 숙원입니다. 반드시 이룩

하십시오. 나도 미흡하나마 협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라고 히데요리 모자

를 격려했다.

대불의 건조는 1602년 착수해 10년 후인 1612년에 끝날 정도의 대공사여서

오사카 성의 금은은 고갈됐다.

그 동안 도요토미 가문이 키운 기요마사, 요시나가, 나가마사, 요시하루,

토시나가 등 유력한 다이묘들은 병으로 쓰러졌다.

호코 사의 대불전과 대불 및 범종의 낙성식은 1614년 8월에 거행될 예정이

었다. 그런데 행사를 며칠 앞두고 별안간 에도에서 낙성식 연기 명령이 내

려왔다.

용마루에 도편수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고 종명(鐘銘)에 새겨진 '군신풍

락'(君臣豊樂), '자손은창'(子孫殷昌)이라는 여덟 자와 '국가안강'(國家安

康)이라는 넉 자가 무엄하다는 이유였다.

용마루에 도편수의 이름을 넣지 않는 것은 고금의 관례이고, 종명도 글자

그대로 새겨 읽으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국가안강은 이에야스(家康)라는 이름을 둘로 갈라놓은

것"이며 "군신풍락 자손은창은 도요토미 가문을 주군으로 삼아 자손의 번창

을 즐긴다"는 뜻이라고 억지를 쓴다.

회심의 미소를 머금은 그는 수습책으로 오사카 성을 비울 것과 모자(히데요

리와 요도 부인)가 에도로 옮겨올 것을 제시했다.

◆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적절하게 이용해라

이 같은 제안에 발끈한 히데요리가 1614년 10월 군사를 출동시켰다는 보고

를 들었을 때 이에야스는 병상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벌떡 일어

나 "오사카 토벌은 나의 숙원이었다"를 외치며 칼을 뽑았다.

이에야스와 그의 아들 히데타다는 군사 20만으로 오사카 성을 포위했다. 직

접적인 전투는 1개월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주위 수십 리에 걸쳐 방대한

해자를 둘러친 오사카 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오사카 성 준공 때 "이 성

을 함락할 수 있는 방법은 외곽의 해자를 메우는 일밖에는 없다"라고 한 말

을 기억해 냈다.

그는 곧 화평 교섭을 시작, "출전 기념으로 하다못해 성 외곽의 해자라도

제거하고 싶다"는 것을 화평 조건으로 제시했다.

도요토미측은 주변성의 해자 제거 정도라면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

각한 나머지 승락했다.

군사들은 주변성의 해자뿐만 아니라 본성의 해자를 순식 간에 메웠다. 이것

은 공사의 착오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지시가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히데요리는 나중에야 이 사실을 거세게 항의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

다.

공사의 책임을 맡은 마사즈미는 "현장의 인부들이 착각한 모양입니다. 정

말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만 할 뿐이었다.

이에야스조차 "어이없는 실수를 했군요. 반드시 할복을 명하는 것으로 사과

를 드리겠소."라고 말로 일관했다.

도요토미 쪽에서는 이때서야 비로소 이에야스의 계략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듬해 4월 이에야스는 서둘러 전쟁준비를 시작한 도요토미 쪽을 비난하면

서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오사카 성을 공격했다. 이때 서군은 10여 만이었

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과는 완전히 양상이 달랐다. 주위에 해자가 없는 성은

호랑이 앞의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았다.

해자가 사라져 농성을 할 수 없게된 서군은 전병력을 동원해 공격해 나왔지

만 2만자의 사상자를 내며 패했다.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은 불탄 덴슈카쿠 밑에 숨었다가 자결, 도요토미 가문

은 2대로 막을 내렸다.

◆ 죽지 않지만 살 수 없도록 만들어라

이에야스는 야전보다도 평화시의 통치와 지배에서 더 뛰어난 진가를 발휘했

다.

그가 구상하는 도쿠가와 정권 영구화 전략은 '농민들을 죽지 않게, 그러나

살 수 없도록 만드는 것'으로 함축된다.

이 전략은 농민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양곡을 제외하고 모두 공

납으로 바치게 해 잉여 생산품이 남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농민뿐 아니라 공인, 상인, 다이묘까지 일관되게 적용됐으며 현

대 일본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박형배기자 art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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