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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역의 美學, 문화공간으로 다시 꽃 피는 '구둔역'


영화 '건축학개론' 속 공간, 폐쇄 4년 만에 서울근교 '힐링' 명소로 재탄생

[유재형기자] 신사임당에겐 세 가지의 소원이 있었다. 자식의 성공, 부모의 행복, 남편과의 사랑.

평범한 듯 보이지만 간절했던 그 세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 길목이 있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에 내려앉은 구둔역 주변 옛길이 그곳이다.

이 옛길은 조선시대부터 의주, 함흥, 강원도로 뻗어가는 길로 금강산을 가려는 사람도 이 길을 지나지 않고서는 목적지를 밟지 못했다. 신사임당은 자식의 성공을 위해 이 옛길을 걸어 한양으로 향했고, 부모의 행복을 빌며 외가인 강릉을 오고 갔으며, 남편과의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이 길을 걸어 금강산으로 걸었다.

누군가는 꿈을 이루고자,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자, 또 누군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던 이 길목, 오늘의 여행지는 폐역 4년 여만에 문화공간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구둔역이다.

◆우리들의 꿈을 실어 나르던 폐역, 구둔역

이 옛길 위 구둔역이 세워진 때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 4월 1일이다. 청량리에서 강릉과 태백을 잇는 중앙선의 일반역으로 출발한 구둔역은 세월은 지났어도 지평면 주민뿐만 아니라 여주군에 이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꿈을 실어 날랐다.

다행을 넘어 신기한 것은 한국 전쟁 당시 엄청난 포화 속에서도 구둔역만큼은 유일하게 폭격을 피해갔고, 이후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구둔역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이들이 오가던 정식 역이었다. 하지만 서서히 이용객이 줄면서 하루 세 번 무궁화호 열차가 서는 간이역이 됐고, 청량리∼원주 복선전철사업으로 기존 노선이 바뀌면서 2012년 8월 16일 폐역으로 남았다.

역사는 당시 목구조 건축물의 전형을 간직하고 있다. 'ㅡ'자형 평면구조, 커다란 박공지붕, 기다란 나무벤치와 매표창구, 낡은 열차 시간표 등 수십 년이 흘렀지만 옛 모습과 흔적을 간직한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선 구둔역. 2006년 12월 등록문화재 제296호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2012년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구둔역이 배경이 되면서 재조명 받기도 했다.

◆소원나무 곁에서 '당신' 얼굴을 떠올리다

구둔역에는 소원나무 한 그루가 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항상 소원이 적힌 메모들이 정성스럽게 걸려있는 이 나무를 사람들은 '소원나무'라 불렀다.

폐역이 돼 기차가 다니지 않는 역이 되었지만 연인끼리, 친구끼리, 가족끼리 이 역을 찾아오는 이들은 소원나무 가지에 자신들의 소원을 매단다. '새엄마가 생기게 해주세요', '우리의 사랑을 지켜주세요', '가족 모두가 건강할 수 있게 해주세요.', '살 빼고 싶어요.' 늦은 가을 바람을 타고 오늘도 이 소박하고 예쁜 꿈들이 반짝인다. 더 이상 기차는 다니지 않지만 꿈들은 서울 방면으로, 혹은 하행선에 올라 어디론가 흐르고 있다.

그런 구둔역이 2016년 새롭게 태어난다. '농업회사법인 꿈동산'에서 한국철도공사로부터 구둔역과 인근 부지를 장기임대해 복합농촌문화예술체험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둔역을 보존하면서도 구둔역을 찾는 이들에게 다양한 농촌문화예술 체험거리를 제공하는 힐링 공간으로 자리했다. 물론 소원나무도 더 많은 사람들이 예쁜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재정비했다.

구둔역은 이제 더 이상 단절된 시간 속에서 쓸쓸히 잊혀져 가는 공간이 아니라는 게 꿈동산 김영환 대표의 설명. 문화적 보존가치가 있는 건축물과 아름다운 자연환경, 그리고 농업이 만나 남녀노소 모두 즐기는 콘텐츠가 재미있게 어우러져진 새로운 6차 산업, 폐역은 새로운 농촌관광지로 부활의 기지개를 켰다.

◆복합농촌문화예술체험장이 된 구둔역의 9가지 비밀

이곳에서는 '환상특급 비밀의 시간여행'이라는 스토리 속에서 9가지 시간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게 한 9가지 문화공간이 발길을 잡는다. 마녀의 꾐에 빠져 헤어지게 된 쌍둥이 소녀의 나나와 미미의 만남이 한 편의 성장동화처럼 펼쳐지는 가운데 체험하게 되는 9가지 시간은 저마다 다양한 의미로 재해석 가능하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용기의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위로의 시간이 되어줄 구둔역의 체험공간은 ▲고양이가 물어다 준 힐링의 시간 ▲행복을 만드는 시간 ▲현재를 있게 하는 과거의 시간 ▲미래를 약속하는 시간 ▲노래하는 비움의 시간 ▲하늘거울과 함께 하는 반추의 시간 ▲미로 속 들꽃의 시간 ▲소원의 시간 ▲행운의 시간 등으로 채워져 있다.

구둔역의 주요 농작물인 블랙베리와 꽃잎 등을 이용한 힐링 차를 마시며 '반추의 의자'에 앉아 낙엽이 내려앉은 마지막 가을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위로가 된다. 꿈의 목적지를 적어 소원나무에 걸어두면 곧 나를 태우러 환상특급열차가 역사 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다.

이 밖에도 구둔역은 어린이를 위한 떡 만들기 체험, 드론 날리기 대회, 지역사회와의 협업을 통한 다양한 이벤트들을 준비하고 있다. 농업법인 꿈동산과 마을 주민들은 구둔역이 새로운 복합농촌문화예술체험장의 롤모델이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소원나무에 매달았다.

고즈넉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내 자신과 마주하는 곳, 지치고 바쁜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넉넉한 여유와 휴식을 가질 수 있는 곳, 남녀노소 누구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내일을 계획할 수 있는 곳, 돌아오는 주말여행지로 구둔역이 어떨까.

유재형기자 webpoem@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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